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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캐논, 니콘에 분노하기 전에 12 2009.06.20
캐논, 니콘에 분노하기 전에,
문화ㆍ예술적 토양을 비옥케 해야

1. 근성으로 살아가던 시절

70~80년대까지 한국복싱은 근성과 오기의 상징이었다

근성과 오기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 처럼 대한민국이 굴러가던 시절이 있었지요.
학생들은 국민교육훈장을 달달외고, 새마을 운동 노래가 하루 일과의 시작이던 시절 말이죠.
근성과 오기가 얼마나 중요한 삶의 덕목이었냐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암울한 시절의 종말을 불러온 민주화 온동의 기저에 까지 오기와 근성이 깔려 있었을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 좀 변했어요.
영화 넘버쓰리 영화에서 송강호가 줄기차게 외친던게 뭡니까.
근성, 아니던가요.
그러나 관객은 거기서 무엇을 느끼던가요?
코믹, 아니던가요?
근성과 오기가 코믹코드로 통하는 세상이 와버린 겁니다.
웃기는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물론 그 가치가 퇴색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주는 일반적인 통념이 웃음거리 정도에서 멈추었다는 뜻이겠지요.



2. 문제는 오기와 근성이 아니다

첫 Made in KOREA 카메라인 KOBICA

제가 뜬금없이 이런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캐논, 니콘, 디까에 분노하다 - 하재근
무슨 내용인고 하니 한국의 정밀기술 산업 부흥이 절실히 필요하고 60~80년대의 대한민국이 올힌하다 시피했던 자동차, 조선, 화학, 전자, 철강산업 처럼 정밀기술 산업을 아주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포스팅 내용이 별 생각 없이 그냥 읽어내려 가긴에 좀 껄적지근했습니다.
한국인의 심장 속에서 오기가 사라져버렸다.
세종로에 다니는 일제차, 외제차를 밀어버리기 위해 독기를 품었던 것 같은 오기가 사라진 것이다. 돈 주고 외제품 사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디까들은 한가하게 영화의 품질을 논했고, 카메라 애호가들은 카메라의 품질만을 논하고 있다. 국적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 중략-

돈 주고 사서 쓰는 것 말고, 우리의 정밀기술, 우리의 부품기술, 우리의 영화 특수효과 같은 고부가가치 기술과 지식을 육성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인이 안정적으로 먹고 산다. 먹고 사는 문제에 안정성이 사라지면 한국은 영원히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할 것이다. (80년대 경제호황 뒤에 민주화가 되고, 2000년대 민생파탄 뒤에 이명박 정부라는 역주행이 찾아온 것을 상기할 일이다.)
그러려면 과거의 오기를 되찾아야 한다. 길바닥에 외제차를 보며 ‘욱’했던 마음. 그 마음 그대로 길바닥의 캐논, 니콘을 보며 ‘욱’하고, <트랜스포머>의 대활약을 보며 ‘욱’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엔 외국 제품, 외국 영화의 품질을 찬양하는 것을 좌우파 모두 자랑으로 여기고, 젊은이들은 외제차나 동경하고 있으니 이 나라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 캐논, 니콘, 디까에 분노하다 - 하재근

과거, 삼성은 왜 미놀타의 카메라를 수입해서 파는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을까

뭐 욱하는 걸 느끼는 것 까지는 좋습니다.
사실 저도 사진을 찍기위해 카메라를 들 때마다 욱하거든요.
'왜 한국에는 이런 카메라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그래서 욱하는 심정에 기술력을 발전시켜 정밀광학산업을 육성하자, 라고 외치는데서 그치고 만다면 그건 꽤나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기술로 만든 최초의 한국 카메라로 기록된 코비카는 왜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을까요.삼성은 왜 미놀타 카메라를, 대우는 야시카 카메라를 수입해서 파는 것으로 만족했을까요. 필름 시대가 끝나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지금 왜 삼성은 펜탁스와 함께 카메라를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건 바로 카메라건 IT건 소위 말하는 정밀산업 분야는 기술만으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소위 말하는 소울, 영혼, 정신 뭐 그런 게 필요하단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소울'이 욱하는 마음과 오기, 근성이란 말은 아닙니다;;;)

솔직한 말로 지금 한국에서 유일하게 DSLR을 생산하는 삼성의 기술력이 아주 못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 니콘과 캐논의 중보급기 기술정도는 충분히 쌓은 상태입니다. 문제는 소위말하는 플레그쉽 바디인데 그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기술이 아닙니다.
독일의 라이카와 콘탁스 카피 카메라를 시작으로 50년 이상 카메라 기술을 쌓아온 일본을 당장 몇년안에 따라잡을 수는 없지요.
(니콘이 1:1 풀프레임 바디를 선보인 것도 근래의 일입니다. 캐논에게 한참이나 뒤쳐져 있었던 기술이라지요.)

우리 나라가 제대로 된 카메라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애석하게도 기술이 모자라서라고 딱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근성과 오기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근본이 안되어 있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3. 기본적인 문화ㆍ예술적 토양을 비옥케 하는 게 급선무

기술력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님을 보여준 애플의 아이팟

무슨 일이든 근본이 되고 기본이 되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법입니다. 천자문도 떼지 않고 사서삼경을 어찌 읽어낼 수 있으며 구구단을 외지 않고 어찌 미분ㆍ적분 이야기할 수 있으며 ABCD도 모르면서 어찌 토익시험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면된다! 기술력을 쌓자! 기술력이 진리!
이런 생각은 푸른지붕아래 사시는 어떤분의 논리와 너무도 닮아 있는 것 같아 겁나기까지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카메라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정밀기술산업의 한 분야라 볼 수 있는 MP3 플레이어를 보자구요. 한때 한국의 MP3 플레이어 생산기술력 및 판매량은 세계 상위권이었습니다. 싸움이건 산업기술이건 선빵이 중요한데 한국이 그 기술분야에선 먼저 기술을 쌓기도 했고 말이죠. 그런데 어느날 아침, 정말 하루아침에 애플의 아이팟에 쓰러졌습니다. 그게 국민들이 근성이 없고 국산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나타난 결과일까요? 톡까놓고 말해서 MP3플레이어 만드는 기술이 애플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더 냉정하게 말하면 아이팟의 음질이 국산 MP3플레이어에 비해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그건 바로 21세기 산업의 기본토양이 되는 문화ㆍ예술분야가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고기 좀 궈먹고 와인 좀 따라마시면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건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문화적인, 예술적인 수준의 질이 저 아래 바닥에서 기고 있는데 무슨 카메라 산업을 논하고 정밀산업분야를 논합니까. 그렇잖아도 문화ㆍ예술 판이 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인데 높으신 분께서는 한예종을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하셨고 말이죠. 나라 꼴이 요모양 요꼴인데 기술력만 쌓자고 소리쳐봐야 공허한 외침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밀기술분야 기술력은 생각만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만랩찍었다 치면 한국은 한두 레벨 아래 정도라고 봐요. 문제는 그 두칸정도의 레벨을 따라잡기 위해서 허구한날 마을 근처 찌질한 몹들 족쳐가며 노가다만 하고 있다는 건데,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삼풍백화점은 기술력이 모자라서 무너진 건물이 아니다

정부가 정밀기술분야의 기술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돈을 퍼다 날라봐야 지금의 자동차산업꼴 밖에 나지 않는다고 봐요. 고만고만하게 적당히 팔아먹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 세계 최고는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정밀산업분야는 적당히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맨날 죽쓸 수 밖에 없습니다.

21세기는 단순히 기술력 운운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작금의 대한민국 산업이 이모양 이꼴인 근본적인 이유는 애석하게도 오기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없는, 그저 외형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만 추구한 한국 근현대사의 우울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다리가 가라앉고, 백화점이 무너진 이유는 건축기술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건축을 대하는 기본적인 마인드가 저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마인드가 제대로 박혀있었야 합니다. 그건 근성과 오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제대로된 카메라가 나올 확율은 얼마나 될까요. 글쎄, 전 아직 한참은 멀었다고 봅니다. 카메라처럼 보이기만 하는 기계를, 사진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대충 만들어 내기야 하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 기계를 카메라라고 칭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기계가 세계시장에서 날개 돋힌듯이 잘 팔릴 수 있을까요? 아니, 하다못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속고 사줄까요? 니콘과 캐논의 카메라를 보며 분노하기 전에, 기술력 운운하기 전에 사진과 문화ㆍ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토양이 좀 더 비옥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그게 과한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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